
A still-cut, Roman Holiday, 1953
시오노 나나미의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를 읽었다. 내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지 않았지만 책을 읽을수록 내 청년 시절이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는 생각은 든다. 잊은 것도 많지만 책을 읽는 동안 내가 좋은 영화 많이 봤구나 생각했다.
책은 그녀 나이 장년의 끝머리 즈음 대략 80년대 초반에서부터 90년대 후반 사이에 써서 여러 잡지에 기고한 글들의 묶음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하필 그때가 나름 치열하게 풀려 나가던 내 청춘의 갈 짓자 행로와 같은 시간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책 속에 영화광으로 짐작되는 돌아가신 그녀 어머니의 영화 품평까지 곁들여 놓았으니 책이 다루고 있는 시간의 폭은 넓어서 게리 쿠퍼와 스펜서 트레이시와 클락 게이블과 에바 가드너와 마를렌 디트리히와 오드리헵번과 그레타 가르보의 전성기로부터 시작해서 해리와 샐리가 서로 만나는 자리까지 이어져 있다. 해리와 샐리가 만나는 자리 앞의 객석에 내가 앉아 있었다. 유명 작가가 영화와 세상을 보는 방식과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도 이 책의 재미이기도 하다. 사람의 느낌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정리하고 표현하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일 것이다. 책을 읽는 내 나쁜 버릇은 반쯤 읽으면 꼭 마지막 페이지를 확인해보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는 것이고 그걸 참지 못해 반만 읽고 만 책이 적지 않다. 그래서 반쯤 읽고 나서도 마지막 페이지를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책이 내 기준으로는 좋은 책인데 이 책이 그랬다.
그런데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를 좋은 책으로 치고 싶은 다른 까닭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 메마르고 팍팍한 일상에서 내가 감수성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이유는 내 청춘이 영화관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책이 이를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200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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