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투안 부르델, 활 쏘는 헤라클레스 첫번 째 버전, 1909

Hercules the Archer the 1st version, Antoine Bourdelle

 

오랜만에 평일 저녁 일곱 시 퇴근 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부르델展』을 관람하는 호사를 누려봤다. 『부르델展』은 내 허접 문화생활에 단비 같았다. 돌이켜보자니 미술 전시회는 몇 해 전에 예술의전당에서 열렸던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회 이후 처음이다. 특히 19세기 서양 회화에 대한 내 기호가 무색하게도 동 시대의 조소 작품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나 다름없었으니 그 유명한 작품 「생각하는 사람」을 만든 로댕(Auguste Rodin)의 수제자이자 스스로 조각에 있어 일가를 이룬 거장 부르델(Antoine Bourdelle)의 작품을 서울 한 복판에서, 그것도 퇴근 후에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기회였던가 말이다.

 

내가 한때 짜집기 레포트에 있어 달인을 자부하였으나 이 엄청난 정보의 시대에 위키사전 따위에서 퍼 담아온 부르델의 일대기라던가 그의 작품 세계를 마치 내 이야기인 양 이 포스팅에 옮겨놓는 낯간지러운 짓은 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어떤 미술작품을 보더라도 여성의 나체에 더 많은 관심과 눈길이 가게 마련인 도리 없는 아재의 눈으로 보자면 전시된 부르델의 조각 작품 전체에 흐르는 강건함에 대한 갈구가 무척 인상적이었다는 점이다. 부르델이 갈망하는 여성의 나체는 비너스의 나체가 아니라 아마조네스의 나체였던 것 같다. 여성의 가슴은 간장 종지를 엎어 놓은 듯 작은 반면 골반은 지나치다 싶을 만치 과장되어 있고 허벅지는 튼실하기 짝이 없었다. 이러한 강건함에 대한 갈구를 집대성한 작품이 부르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활 쏘는 헤라클레스」이다. 생략된 활시위에 실린 강력한 장력(tension)은 헤라클레스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흐르는 터질 듯 한 완력과 대립하여 팽팽한 긴장감의 극단을 이루고 있다. 전시 해설서에는 그 긴장의 중심점이 헤라클레스의 가슴이라고 되어 있던데 조각 작품을 보는데 문외한인 내 시선으로 보기로는 그 숨 막히는 긴장감의 정점은 헤라클레스의 가슴이 아니라 흔들면 왕방울 소리가 쩌렁쩌렁 울릴 것만 같이 암팡지게 늘어진 헤라클레스의 음낭, 곧 그 불알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보고 있자니 헤라클레스가 활시위의 장력을 이기기 위해 발을 뻗어 버티고 있는 바위는 남근석과 같은 모양으로도 보였다.

 

전시는 부르델의 대표 청동 조상(彫像)들 외에도 그가 작품을 위해 그린 스케치 등의 회화작품도 포함하고 있었는데 이 회화 작품들의 수준 역시 조각 작품들 못지 않았고 아마 회화에 천작했더라도 좋은 작품들을 많이 남겼으리라 싶었다. 세상에 기본기가 중요하지 않은 분야가 없는 법이다. 함께 전시된 많은 회화 작품들 중 단연 내 눈길을 끈 것은 그의 자화상이었다. 병약하고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바깥세상을 노려보고 있는 부르델의 모습은 분명 그가 작품을 통하여 갈구한 강건한 이미지와는 한참 거리가 멀어 보였고 흑백 사진으로 남은 그의 젊은 시절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강건함은 커녕 음침한 구석에서 숨어 딸이나 치고 있을 인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긴 걸작이야말로 바로 그 지점, 유치한 광고 카피처럼 강한 것은 아름답다는 치열한 갈망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싶고 예술작품을 통하여 그것을 표현해내고 싶다는 의지, 그 의지를 실현할 예술적 재능이야말로 천재가 가진 특권일 것이다.

 

잘 모르지만, 석고 따위의 소프트 한 재질로 본을 만든 다음 거푸집에 청동을 부어 만들었을 청동 조상은 거푸집의 내구성이 허락하는 한 같은 작품을 여러 번 찍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청동 조각상이 완성된 이후에는 더욱 손쉽게 복제해낼 수 있을 것이다. 거장의 작품을 전시해놓은 경우에 관람객은 그 작품이 몇 번째 찍어낸 작품인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아쉽게도 이번 전시회에 전시된 작품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점이 옥의 티라 하겠다. 덧붙여 거장의 걸작을 감상하고서 예의 없게도 딸이나 즐기게 생겼다는 나의 결례를 더는 한마디를 남겨야 하겠다. 나이든 부르델을 담은 사진 속에는 머리가 훌러덩 까진 풍채 좋은 아저씨가 영민한 눈을 반짝이며 세상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것을 보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다 나쁜 것만은 아닌 듯싶기도 하며 나이별로 그의 작품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살펴보는 것 역시 재미있는 작업일 듯싶기도 한데 이즈음에서 나의 조잡한 『부르델展』 관람기를 접는 것이 이 글을 읽는 이를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나을 듯하다. 2008


 

에밀 앙투안 부르델 Emil Antoine Bourdelle (1861 ~ 1929) 프랑스의 조각가가로 탁월한 솜씨로 파리의 미술학교에 진학하였으나 기존의 아카데미즘에 싫증이 나서 학교를 그만두고 독학으로 조각에 매진했다. 1889년 살롱 출품작이 로댕에게 인정되어 그의 제자가 되었다. 힘있고 역동적인 동세와 거친 표면처리는 스승인 로댕을 닮았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부르델은 고대 조각상의 견고한 형태미를 추구했다. 탄탄한 짜임새와 구축적 형태는 로댕과는 다른 부르델만의 조각 예술을 완성하는 결정적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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